나를 보내신 이에게 돌아가리라

성경말씀
요한복음 7장 25~36절
설교일자
20210220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2-20 12:00
조회
8
요 7:25-36 나를 보내신 이에게 돌아가리라(2월 20일 토요일)
25 예루살렘 사람 중에서 어떤 사람이 말하되 이는 그들이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
26 보라 드러나게 말하되 그들이 아무 말도 아니하는도다 당국자들은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인 줄 알았는가
27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하는지라
28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니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29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 하시니
30 그들이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31 무리 중의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이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하니
32 예수에 대하여 무리가 수군거리는 것이 바리새인들에게 들린지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를 잡으려고 아랫사람들을 보내니
3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34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하시니
35 이에 유대인들이 서로 묻되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그를 만나지 못하리요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 터인가
36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한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니라

묵상, 기도와 같은 일은 그리스도이라면 반드시 해야 할 의무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묵상'이라는 단어의 사용처 중에서 여호수아 1장 8절과 시편 1편 2절은 우리가 눈 여겨 봐야 할 구절입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조건 중 하나를 '묵상'으로 규정하셨고, 시인에게도 동일하게 주님의 길을 걸어야 형통할 수 있음을 말해줍니다. '형통'은 내가 원하는 대로 잘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결과가 있더라도 하나님이 임재가 있는 상황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기를 원하면서 묵상하지 않는 것은 불로소득만 바라보는 사람과 같습니다. 묵상은 신앙적 노동이고, 기도를 바르게 하도록 만들어 주며, 그리스도인의 의무이자, 주님과 동행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됩니다. 매일 정해진 본문으로 묵상을 하거나, 어떤 말씀으로 즉흥적으로 묵상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시간"입니다.
최근 어린이 보호구역인 도로는 차선의 숫자와 상관 없이 대부분 30km로 운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걷는 속도보다 훨씬 빠르지만, 차를 타고 가니 매우 느리게 느껴집니다. 우리는 "빠름"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고속도로를 이용하여 다른 지역을 갈 때, 얼마나 빠르게 그 지역에 도착했는지 말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묵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 본문을 빠르게 읽고 자기 생각대로 묵상하고 마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묵상의 기쁨이 없거나, 하나님의 속도를 알지 못하면 모든 것이 급해집니다. 제가 글을 쓰는 것은 개인 묵상에 도움을 드리는 것이지 정답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묵상은 나와 말씀이 1대 1로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유로운 시간 속에서 천천히 성경을 음미하며, 주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살피세요. 존 필립스(John Phillips)는 성경 말씀을 심사숙고 할 때 다음과 같은 질문을 이용한다고 합니다. "내가 피해야 하는 어떤 죄가 여기에 있는가? 내가 필요로 하는 어떤 약속이 있는가? 내가 얻어야 할 어떤 승리가 있는가? 내가 향유해야 할 어떤 행복이 있는가? 내가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 인간, 죄 등에 관하여 전에 결코 알지 못했던 어떤 진리가 있는가? 내가 여기서 배울 수 있는 중요한 것이 있는가?" 이것 역시 참고 사항입니다. 여유로운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본문을 묵상하세요. 난독증이 있는지 살피시고, 아침에 쓴 메모가 있다면, 점심과 저녁에 계속 다시 살펴보세요.
교회가 혈연, 지연, 학연으로 뭉치게 되면 말씀은 희미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혈연, 예루살렘 사람이라는 지연, 누구를 스승으로 모시고 있는지(어느 학파인지)에 관한 학연으로 뭉쳐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출신은 분명 큰 관심사였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렛 출신이었고, 목수 일을 했으며, 어느 학파나 스승이 없었던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이미 예수님에 관해 많은 것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25~27절). 누군가가 죽이려고 했던 사람이었고(25절), 로마가 내버려 둔 사람이었고(26절), 출신을 알고 있었습니다(27절). 그래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기 더 어려웠습니다. 사람들은 메시아가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갑자기 올 것을 기대했습니다. 왜 이런 기대가 있었을까요? 우선 아브라함과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상황이 떠오릅니다. 여호수아와 사무엘, 사울과 다윗 왕이 어떻게 부름을 받았는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말라기 3장 1절에도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라고 말씀하고 있으니 유대인들에게 메시아는 갑작스럽고 신비롭게 나타나야 정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천천히 묵상하지 못했던 사람들과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한다(28절)"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출신, 학력 등을 다 알고 있었던 그들이지만, 정작 그를 보낸 하나님을 몰랐던 것이죠. 성령으로 잉태되어 하나님에 의해 보냄받은 분이라는 사실을 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이 자신을 보냈다는 예수님의 말을 신성모독으로 여겨 그를 잡으려고 합니다(30절). 예수님을 잡으려는 시도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말씀이 있을 때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잡고자"라는 말은 문법적으로 "미완료 시제"를 가지고 있어서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행위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그들의 손에서 보호받고 벗어났는지 알 수 없습니다. 성경이 알려주는 것은 "아직 그의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것 뿐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어려움이 생겼을 때, 하나님 탓을 해야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때)과 인도하심은 무엇인지 질문할 수 있어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잡으려는 사람,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31~32절). 세상과 교회 안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모습이 2000년 전에도 동일하게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머지 않아 보내신 이에게 돌아갈 것을 말씀합니다(33~34절). 이것은 예수님 자신의 죽음을 의미하는 말이었지만, 유대인들은 "장소"개념으로만 이해합니다. 유대인들의 어리석음음은 난독증, 난청증 때문이었을까요?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28절)"는 예수님의 말씀이 슬프게 다가옵니다. 성경을 눈 앞에 두고,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그리스도인으로 살겠다고 마음 먹으면서 참되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 만큼 슬픈 일이 어디있을까요.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되새겨 봅니다. 특히,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고백이 헛되지 않기를 간구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