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잡을 수 없었던 하속들

성경말씀
요한복음 7장 45~53절
설교일자
20210222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02-22 12:20
조회
7
요 7:45-53 예수를 잡을 수 없었던 하속들(2월 22일 월요일)
45 아랫사람들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로 오니 그들이 묻되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냐
46 아랫사람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
47 바리새인들이 대답하되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48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자가 있느냐
49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50 그 중의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그들에게 말하되
51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
52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53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변화'라는 단어는 기독교 전문 용어로 '성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화는 주님을 닮아가는 과정과 그 끝을 의미하죠. 성화의 시작은 거듭남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거듭남은 물과 성령으로 주어지는 세례에 의해 이루어지죠. 한 사람이 교회에서 세례를 받는 것은 내가 주님의 사람으로 살겠다는 거듭남의 의지이자 다짐입니다. 여기서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성화를 포함한) 거듭남의 은혜는 나의 선택과 의지가 핵심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례 받고 신앙생활하는데 내 삶에 왜 그렇게 역동적인 변화가 없냐고요? 혹시 성령 세례도 없고, 하나님의 역사와 성령을 경험하지 못해서 그런것 아니냐고요? 자주 말씀드리는 것 중 하나는 성령 세례, 성령 체험했다고 해서 성화의 완전한 과정에 이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끔 이런 말을 듣습니다. "저 사람 많이 변했어. 10년 전엔 안그랬거든." 사람이 10년간 똑같은 모습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요?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심하게 착각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나이를 먹고 힘이 빠진 것을 변화(성화, 거듭남)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직장 다닐때의 모습과 퇴직후의 모습은 다릅니다. 이것은 성화와 상관 없습니다. 신혼부부일때와 아이가 생겼을 때의 모습도 다릅니다. 사회의 발전과 기술의 발전으로 우리는 급격한 변화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변화 속에 살면서 우리도 자연스럽게 변화합니다. 이것이 성화가 아닙니다. 성화는 예수 믿기 전화 후의 삶이 점진적이든, 결정적이든 바뀌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삶의 자세는 무엇일까요? 내가 은혜로 변화하고 있음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우리가 '공'이라고 부르는 물건은 모두가 둥근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굴러간다는 표현은 위가 아래로 내려오고, 아래가 위로 올라가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 공은 굴러가죠. 말씀 안읽던 분들이 성경공부를 하고, 예배 참석 안하던 분들이 예배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스스로는 "나는 변화가 없는데?"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공의 중심은 움직임이 없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많은 움직임이 있죠. 즉, 주관적인 관점에서 나의 신앙은 그대로인 듯해도, 객관적인 시선 즉, 하나님의 시선으로는 성장하고 발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기 이전과 지금의 삶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살펴보면서 말씀과 함께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바로 내가 은혜로 변화하고 있는 삶이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또, 신체, 나이, 사회, 기술, 상황의 변화를 성화라고 착각하는 일도 버리세요.
종교지도자들은 아랫사람을 시켜 예수님을 잡아오게 했습니다. 하지만, 아랫사람이 예수님을 잡으려 했을 때, 말씀의 권세를 경험하게 됩니다. "잡고자 했지만, 손을 댈 수 없었다(44절)"는 말은 예수님의 힘이 얼마나 크게 느껴졌는지 알 수 있는 구절입니다. 예수님은 아직 사람들에게 잡힐 때가 아닙니다. 죽음을 맞이할 때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때가 이르지 않았기에 하나님은 아랫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시기를 맞춰 갑니다. 아랫사람들이 어떻게 변화되었을까요?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종교 지도자들에게 말합니다.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습니다." 로마시대 법을 어긴 사람의 목숨은 파리 목숨이었습니다. 아랫사람의 목숨도 파리 목숨이었죠. 주인과 상관의 명령은 절대적이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아랫사람은 예수님이 진짜 메시아라는 마음을 먹었고, 그렇기에 예수님을 잡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아랫사람'은 어느 부류 사람일까요? 일반 노예? 아니면 군인? 예수님을 잡으라고 명령한 것은 제사장과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제사장과 함께 일하는 사람은 레위인이었죠. 그래서 여기에 나타나는 '아랫사람'은 레위인일 가능성이 큽니다. 성경을 깊이 알고 있고, 특히 제사법, 성전법, 정결법과 같은 성전 안에서의 법은 모르는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변화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사건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너희도 미혹되었느냐?"는 말로 그들의 지식과 변화를 저주합니다(47~49절).
그런데 갑자기 미혹된 당국자이자 바리새인이 등장합니다. 바로 '니고데모'입니다. 니고데모의 모습을 보니 이전과는 조금 달라 보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그의 반응이 나타나지 않죠. 4장에 나타난 사마리아 여인과 비교하면 그의 모습은 변화될 것 같지 않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7장에 이르러서는 다른 바리새인들의 말을 무조건 따르지 않고, 예수님에게도 변호권을 줘야 한다는 말을 합니다. 마치 예수님의 말씀에 중독된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니고데모는 왜 사마리아 여인과 같은 반응이 없었던 걸까요? 어떤 사람은 은혜를 경험했을 때, 급진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평생 불교에 머물렀던 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을 때, 집안의 모든 불상을 버렸습니다. 급진적인 반응의 한 모습이죠. 우회적이면서 점진적인 반응을 보이는 분들이 있습니다. 삶을 성찰하고, 검증하면서 지름길로 가기 보다 옳은 길을 주변을 살피며 정석대로 가려는 분이죠. 사마리아 여인이 급진적이라면, 니고데모는 점진적인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두 가지 모습 중 어느 것이 우월하거나 중요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단, 두 가지 모습 모두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끊임 없는 자기 부인과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가려는 의지가 필요하죠.
니고데모의 반응에 바리새인들이 격분합니다.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없다(52절)"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갈릴리 출신이 아니고 베들레헴 출신이며, 갈릴리 출신 선지자는 요나와 호세아가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던 자신들의 편협한 생각에 갇혀 진실마저 왜곡해버렸습니다. 오늘 등장한는 사람들 중에서 우리의 모습은 어디에 있을까요? 이제 막 변화의 시작을 경험한 아랫사람? 발전적으로 계속 변화하고 있는 니고데모? 회칠한 무덤이라고 욕을 먹는 제사장과 바리새인?
사람이 사람을 변화시키려고 하니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내가 변하려고 하니 변하지 않죠. 내 생각과 관점과 편협함이 가득차 있는데 어떻게 변할 수 있을까요. 목사도 성도도 모두 은혜 없이 변화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어리석음과 나약함, 죄된 모습과 거룩한 형상을 잃어버린 슬픔과 고통을 깊이 알지 못하면 변화란 누군가의 간증에서나 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 됩니다. 쉽게 변화되지 않느다고 해서 좌절하고 실망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손을 내밀고 계십니다. 말씀을 통해 주님의 손을 붙잡고 공이 굴러가듯 한 걸음씩 전진하여 주님의 온전하심, 거룩함,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