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의존하는 외교

성경말씀
호세아 7장 8~16절
설교일자
20211123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1-11-23 07:11
조회
6
◉ 호 7:8-16 세상을 의존하는 외교
8 에브라임이 여러 민족 가운데에 혼합되니 그는 곧 뒤집지 않은 전병이로다
9 이방인들이 그의 힘을 삼켰으나 알지 못하고 백발이 무성할지라도 알지 못하는도다
10 이스라엘의 교만은 그 얼굴에 드러났나니 그들이 이 모든 일을 당하여도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구하지 아니하도다
11 에브라임은 어리석은 비둘기 같이 지혜가 없어서 애굽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앗수르로 가는도다
12 그들이 갈 때에 내가 나의 그물을 그 위에 쳐서 공중의 새처럼 떨어뜨리고 전에 그 회중에 들려 준 대로 그들을 징계하리라
13 화 있을진저 그들이 나를 떠나 그릇 갔음이니라 패망할진저 그들이 내게 범죄하였음이니라 내가 그들을 건져 주려 하나 그들이 나를 거슬러 거짓을 말하고
14 성심으로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며 오직 침상에서 슬피 부르짖으며 곡식과 새 포도주로 말미암아 모이며 나를 거역하는도다
15 내가 그들 팔을 연습시켜 힘 있게 하였으나 그들은 내게 대하여 악을 꾀하는도다
16 그들은 돌아오나 높으신 자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니 속이는 활과 같으며 그들의 지도자들은 그 혀의 거친 말로 말미암아 칼에 엎드러지리니 이것이 애굽 땅에서 조롱거리가 되리라

회심, 거룩, 구원과 같은 단어들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일관되게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결국 세상의 방식과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으로 나의(우리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죠. 우리는 평범한 일상에서가 아니라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 앞에서 예수를 시인했으며, 세상의 삶의 방식을 청산하고 하나님 나라로 전진하는 일생일대의 방향 전환을 이룬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다는 것은 세상을 의지하고, 익숙한 세상의 방법대로가 아닌 진리와의 만남을 통해 좁은 길과 문으로 가는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은 지속되는 쿠데타와 권력의 찬탈, 그리고 백성들을 향한 억압과 주변 국가들로 인해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호세아 7장 1~7절은 북이스라엘의 내부 문제에 집중했다면, 이제 8~16절에서는 하나님 대신 다른 나라의 도움을 구하는 북이스라엘의 모습을 다루게 됩니다.
화덕에는 빵을 굽는 숯불이 들어 있고, 화덕 안쪽에는 밀가루 반죽이 붙어 있게 됩니다. 하나님은 4~7절에서는 숯불이 바로 북이스라엘이라고 말씀하셨고 이제 8절에서는 화덕에서 구워지는 빵이 바로 이스라엘이라고 말씀합니다. 빵을 제대로 굽기 위해서는 적절한 불 온도와 제대로 된 밀가루 반죽이 필요하겠죠. 적절한 불 온도가 유지되더라도 빵을 뒤집지 않으면 한쪽이 까맣게 타버린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8절에 있는 “뒤집지 않은 전병”은 크게 2가지를 의미합니다. 하나는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빵을 뒤집지 않아서 타버린 상태를 의미합니다. 한 마디로 북이스라엘은 쓸모없이 버려지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죠. 다른 하나는 ‘뒤집다(%p;h', 하파크)’라는 단어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뒤집다’라는 말은 ‘돌리다’, ‘변화시키다’, ‘뒤집다’, ‘전복시키다’라는 의미로 사용된 단어입니다. 여기서 ‘전복시키다’라는 의미는 주로 회개하지 않는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와 진노에 대한 표현으로 등장합니다(창 19:21; 25:29; 신 29:23; 사 13:19; 렘 20:16; 49:18; 50:40; 암 4:11; 애 4:6). 특히 잠언 12장 7절의 표현을 보면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쉽게 번역하면 “악인의 집은 뒤집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겠지만, 의인의 집은 서 있게 된다”라는 뜻입니다. 즉, “뒤집지 않은 전병”은 곧 뒤집혀 아무 쓸모 없는 상태가 될 것을 암시합니다.
나라가 쓸모없는 상태로 뒤집히는데 북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까요?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입니다(9절). 풍요를 누리며 자신들이 최고라고 생각했던 북이스라엘이지만, 정작 자신들이 멸망하는 데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 어리석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데다 교만하기까지 하니 하나님께 돌이킬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10절).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예배를 통해 우리 삶에서 어떤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 내느냐가 중요합니다. 요한복음 5장 29절에는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말씀합니다. 선한 자나 악한 자나 모두 부활합니다. 그러나 선한 자는 생명이 있지만, 악한 자는 심판이 있을 뿐입니다.
북이스라엘이 예배를 드렸다고 해서 그들이 멸망을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죄악이 너무 크고, 교만하며,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북이스라엘은 외교적 수단으로 위기를 모면하려 합니다. 하나님을 찾는 대신 앗수르와 이집트를 찾아갑니다. 이것은 지혜 없는(단순하여 잘 흔들리는) 비둘기와 같다고 성경은 말합니다(11절). 사실 우리나라는 이스라엘의 지역적 특성과 비슷하여 현재 북이스라엘의 모습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강대국 사이에서 수많은 전쟁을 치르며 살아남은 것은 기적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라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 보호와 사랑을 잊은 북이스라엘을 향해 심판을 선언합니다. 13절에 ‘화 있을진저’와 ‘패망할진저’라는 말은 서로 같은 방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슬픔과 화(재앙)에 관한 탄식이 ‘화 있을진저’라는 말로 나타나고, 북이스라엘의 멸망에 관한 고백이 ‘패망할진저’라는 말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탄식이 울려 퍼질 만큼 하나님이 심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인애와 긍휼과 은혜를 백성들이 모르고 전혀 반대되는 모습으로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3~16절에는 하나님의 마음과 죄악에 가득한 백성들의 모습이 대조를 이루며 결국 우리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살펴보게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핵심은 자아실현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진 달란트를 사용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게 사용해야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게 사용해야 합니다(벧전 4:10~11). 내게 은혜가 없다는 것은 죄가 커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내 안의 괴물에게 먹을 것을 주지 마십시오. 우리의 양식은 오로지 말씀이며,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주님이 주시는 생명뿐입니다.